작가 블랙판다 - 단편소설집
스물셋, 예술에 꽂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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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실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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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6일 입대’
지금 난 떨리는 눈으로 입대영장을 조목조목 읽고 있었다.
24살로 이미 적지않은 나이가 되어있었지만 군 입대 만큼은 남의 일이길 바래왔다.
10월의 날씨는 왠지 어둡다. 투명한 하늘과 귓불을 스치는 바람도 난 어두워 보인다. 구름이 없고 온통 새파란 바다처럼 하늘이 푸르지만 곧 비가 올것처럼 내 마음은 온통 시커멓다.
입대 영장을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그 종이로 21500원이라는 돈과 바꿀 수 있어 어둡던 내심장은 잠시나마 햇빛이 뚫고 지나갔다.
오후2시. 지금은 우체국 안에 있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사람이 빼곡이 차 있어 답답함을 느낀다. 보잘것없는 누런 레자 소파에 앉아 VOGUE 잡지를 손에 들었다.
대기표는 308번. 지금은 286번을 하고 있으니 대략 17분48초를 기다리면 내 차례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에 VOGUE 잡지는 대략 91페이지 정도 읽을 것이다.
정확히 19분이 지나자 내 차례가 왔다. 그때 VOGUE 잡지는 298 페이지나 읽었다. 읽었다기 보다는 그냥 훑었다.
21500원을 받았다. 그냥 아무 느낌이 안들었다. 남들은 멋있는 표현을 잘 하던데 난 표현할 게 없었다. 그냥 아무 느낌이 없었다.
핸드폰을 만져봤다. 오늘따라 왜이리 소중하게 느껴지던지. 24년간 살아오면서 부모님과 대화한 시간보다 6개월간 함께 온 나의 핸드폰과의 대화가 더욱 길었다. 그래서 더욱 핸드폰을 만지니 슬퍼진다.
지금 내가 서있는 모습을 찍었다. 표정없이, 그리고 느낌도, 사랑동, 그 무엇 하나도 없듯이 난 찍고 또 찍었다. 핸드폰 용량이 꽉 차서 찍어지지 않아도 난 계속해서 찍었다. 곧 휴대폰은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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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6일
아침 8시.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떠한 사람의 숨결도 찾을 수 없었다. 식탁에는 어머니의 가식적인 사랑이 담긴 쪽지가 적혀있었고 20만원이 놓여있었다. 오늘 반찬도 역시 김치와 계란후라이, 그리고 밥 뿐이다. 난 이렇게 24년간 단 한번도 바뀌지 않는 불변의 메뉴로 살아왔다. 그래도 난 이 밥을 먹었다.
차디찬 밥과 얼음같은 게란후라이와 전혀 간이 안 밴 김치.
난 전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오전9시가 되어 2호선 성내역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내가 지금 군대에 간다는 사실도 모르고 내 앞좌석 사람은 잠만 자고 있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곱슬머리 아줌마는 촌스런 청자켓에, 80년대 마이클잭슨이 즐겨 입던 기지 바지를 입고 자고 있었다.
난 속으로 ‘나는 지금 군대를 간다고!’를 목에 고름이 나올정도로 외치고 또 외쳤다.
동서울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논산 연무행 버스를 타고 지하철 아줌마처럼 촌스럽게 잠을 잤다. 한달뒤면 25살이고 제대하면 27살.
이런 엿같은 생각에 제대로 잠을 이룰수 없었다.
속이 울렁거리려 할 때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바로 택시를 잡아 훈련소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창가로 주위를 둘러보니 부모님과 함께 온 사람, 친구와, 연인과 모두들 함께 온 모양이다. 나는 사실 혼자왔지만 내 앞에 택시기사 아저씨가 함께 있다는 생각에 외롭지는 않았다.
도착 후 택시아저씨는 부모님보다 정감있는 목소리로 건강하라는 말을 남기고 돈을받고 유유히 떠났다.
난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르고, 식당에서 갈비탕을 먹고 시계를 보니 12시50분이었다. 이제 10분뒤면 군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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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50분. 그 많던 인원들은 각자 집에가고 우리들만 남겨두었다.
군복과 내복, 내의와 운동화, 체육복 등 온갖 싸구려 물건들을 우리들에게 뿌려댔다. 조교들의 냉정한 목소리들이 귓가에 울렸다.
“단 한 개라도 지급받지 못한게 있으면 알아서 해라!”
알아서 하라는 말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좋지 않은 이야기인 것은 분명하다. 군복과 구두와 모자를 써보니 조금은 군인인 듯 행동에 ‘각’이 지기 시작했다.
오후 4시부터는 ‘차렷,열중셧’ 만 질리게 했다. 경례도 하고, 다시 ‘차렷,열중셧’ 만 했다. 이제 2년동안 해야한다는 생각에 세상이 까맣게 보였다.
2시간동안 그짓을 하고 조교의 냉정한 목소리로
“식사집합!”
이란 구령에 우린 불이나케 모여 밥을 먹었다.
미끌미끌한 철제 밥통에 콩나물 김치볶음, 콩나물 무침, 콩나물 국에 밥을 먹었다. 아마 이틀만 이렇게 먹어도 콩나물 똥을 쌀게 분명하다.
젓가락도 없이 숟가락으로만 밥 먹는게 기분 나빴지만 주위 녀석들은 잘 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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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근무중이다. 불침번이라는 말도 안되는 짓을 하라고 한다. 목에 이상한 판대기로 만든 목걸이로 난, 집을 지키는 개처럼 아무런 움직임없이 있었다. 차라리 개가 되어 실컷 짖고 싶었다.
이곳에 온지 이제 12시간이 지났다. 어제 오후 1시에 도착해 지금 시각은 새벽1시가 되니까 정확히 12시간이 된 것이다.
미칠 것 같은 답답함과 전혀 느끼지 않았을 것 같은 부모님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난 미친놈 같았다. 숨이 가빠왔다. 2년동안, 무려 730일 동안 이렇게 산다는 생각에 내 눈은 돌아가고 장님이 되는 것 같았다. 지옥이 이런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개 목걸이를 차고 새벽1시에 일어나 짖지도 못하는 개가 되어 보고싶지도 않은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미친 개가 되었다. 의자에는 무언가가 뚝뚝 떨어졌다. 바지는 젖어있었다. 팬티도 젖어있었다. 난 그만 미친개처럼 오줌을 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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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1월15일
더블백을 싸고 지옥을 탈출했다. 한달이 넘는 이곳의 생활로 내 정신과 육체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눈은 풀린 알콜중독자가 되었고, 코는 아무 냄새도 못 맡는 지독한 충녹증 환자가 되었고, 내 심장은 자유에 쇠사슬을 묶은 심근경색의 환자가 되었다.
난 지옥행 탈출열차를 타고 있다. 내 옆자리는 낯이 익지만 이름도 모르는 녀석이 타고 있었다. 관심없었다. 그녀석 따위는.
열차 창 밖에는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들이 걸어다녔다. 창을 기준으로 밖은 천국, 안은 지옥이었다. 소변을 싸러가면 멀쑥한 정장차림의 녀석이 뒤를 쫓아 다녔다.
열차가 서울 지나고 있다.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며 손을 흔든다. 우린 열차안의 동물이 되어 그들의 인사에 무엇인가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의무가 든다. 사람들이 우릴 향해 과자와 초코파이를 던지면 우린 미친 듯이 경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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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9시. 지금 난 이등병이 되어 고참들의 신고식을 기다리고 있다. 누구나 알 정도로 식상한 방법을 여기에서 또 한 번 겪었다. 병장이 이등병 옷을 입고 나한테 존댓말로 말을 했다. 하지만 난 그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이렇게 신고식은 싱겁게 끝났고 이미지 게임만을 남겨두었다.
고참들은 나보다 보통 두 살에서 세 살이 적었다. 하지만 그녀석들은 나보러 예의가 없다는 둥, 싸가지가 없다는 둥 말도 안되는 말을 하고 있었다.
어떤 고참이 이중에서 누가 제일 더러울 것 같냐는 질문을 해서 난 없다고 대답했다. 또 다른 고참이 이중에서 제일 짠돌이 일 것 같냐는 질문에 난 또한번 없다고 대답하자 이미지게임은 그것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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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자대에 온지 두달이 지나도 보직이 없었다. 그저 청소하고 밥만 먹는게 나의 업무였다.
3월20일이 되었다. 그 날은 정말 봄내음이 만연한 오후였다. 이제 막 녹색풀들이 자라기 시작했고 햋빛은 내 얼굴을 사정없이 내려 쬐었다.
난 곡괭이를 들고 땅을 파다 돌 뿌리를 잘 못 건드려 눈에 돌맹이가 부딪히는 사고가 일어났다. 급히 근처 군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입실을 시작해서, 새로운 군생활이 시작되었다.
나의 병명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안구착심증’ 이란 이름으로 난 입실을 했다. 나를 갈구는 고참도 없고 하루종일 청소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지옥같던 군 생활에 자그마한 즐거움을 느꼈다.
2주동안 난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잠만 잤다. 어떤날은 아침만 먹은채 20시간 정도를 잠만 잤다. 꿈도 없이 잠만자니 2주일은 너무도 허무하고 빠르게 지나갔다. 다시 내무실로 가야한다는 생각이드니, 다시 입대하던 우울한 느낌이 떠올랐다.
며칠간은 선임들이 나를 가만 두었다. 사실 나를 피하고 있었다. 얘기도 안하고 나를 ‘왕따’ 시키던 분위기였다. 하지만 오히려 얼마나 감사하던지 난 기뻐서 울고싶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시 선임들의 갈굼은 오히려 심해졌고 청소의 업무는 더욱 가중되었다. 지금의 가장 최선의 방법은 입실 뿐이었다.
곡괭이 작업이 생기면 꼭 참가하여 돌이 많은 곳을 골라 사정없이 휘둘렀지만 이전과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할수없이 난 돌을 들고 내눈을 사정없이 쳤다. 실명이 될 정도로 쳤다면 난 정말 미친놈이겠지만, 약간 눈이 시뻘겋게 충혈 될 정도로만 작품을 만들어 군의관께 제출했다. 결과는 일주일 입실.
난 또 이렇게 일주일동안 잠만 자며 행복하게 시간을 보냈고, 4박5일간의 100일 휴가도 집에서 잠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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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생활을 한지도 6개월이 되었다. 군생활의 절반은 입실로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점점 선임과 동기, 그리고 후임들마저 나를 벌레 보는 듯 쳐다본다. 하지만 난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그렇게 잔인하게 쳐다볼수록 난 더욱 입실중독에 더욱 빠져들고 있었다.
주말이 되었던 토요일 오후. 난 일일취사병 체험이란 프로그램에 뽑혀 취사장에 올라가 온갖 요리를 하는 체험을 했다. 칼로 야채를 썰고, 육개장을 만들고, 온갖 요리를 체험하였지만, 나의 눈과 귀와 모든 세포는 어떻게, 무엇으로, 언제 입실을 할것인지, 더듬이가 사방팔방을 훑고 있었다. 만약 칼로 야채를 썰다 손을 벤다면 입실이 아니라 그냥 치료만 받을거란 가상 시뮬레이션이 작동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생성되었다.
30분뒤에는 치킨을 튀긴다고 하였다. 난 기름을 뒤집어 쓸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180도 고온의 식용류를 붓고 치킨요리가 시작되었다. 기름튀기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고, 난 취사병 뒤에서 보조를 하면서 기회를 노렸다. 20분뒤 취사병은 잠깐 소변보러 간다는 말을 하고 사라졌다. 나의 심장은 엄청난 심박수에 터질 듯 했다.
난 손목까지 기름에 손을 집어넣고 얼른 뺏다.
“으아!!!”
미칠 것 같은 고통에 난 자세심을 잃었다. 죽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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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던 입실을 했다. 내가 생각해도 집요할 정도였다. 군의관과 면담이 10분뒤에 있다.
“왜 사고가 난거지?”
“기름통에 집게가 빠져서 빼내려다가 그만 사고가 났습니다.”
“조금 심각한 얘기인데, 수술이 잘못되면 한 쪽 손을 못쓸수 있네. 마음의 준비를 하는게 좋을것이야.”
군의관과의 면담 중에 난 슬퍼보이는 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러면 군의관이 입실 기간을 늘려줄 것 같아서이다.
2주뒤의 수술은 성공리에 마쳐서 다행이었다. 입실 때문에 한 쪽 팔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 수술로 인해서 약 한달간 꿈같은 입실을 했다. 역시 시체처럼 잠만 잤다. 씻지도 않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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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병이 지나고 상병이 되자 누구도 나의 입실생활에 관여하지 않았다. 여타 다른 간부들도 포기한 눈치였다. 난 그렇게 존재감없는 녀석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상병이 된 후 난 원인모를 두통에 시달렸다. 뒷골이 땡기고 머리가 터질듯한 고통이 느껴졌고, 난 나의 처방식대로 입실했다.
그저 머리가 아플땐 두통약을 먹었고 더 이상의 치료는 필요없었다. 그저 입실을 통해 잠만 잘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치료책은 없었다.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지 두달이 지날즈음 무려 살이 15킬로그램이나 빠졌다.
입실로 인해서 운동부족과 불규칙한 식생활로 인한 것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많이 몸무게가 줄어들었다. 70킬로그램인 내가 55까지 빠지면서 전투복과 체육복이 너무도 헐렁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것은 조금씩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다.
머리를 감을때마다 보통 200~300 가닥씩 꾸준히 빠지더니, 이제는 남들이 알아볼 정도로 심각해졌다. 그래서 입실은 더욱 오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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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난 입실하는 중이다. 그리 놀라울 것도 없다. 그런데 이제는 입실이 아니라 입원이라 하는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난 사흘전에 급성 뇌종양으로 전역을 했다. 그리고 곧바로 집 근처 강남성심병원에 입원했다. 그런데 이제는 입원이 너무 싫어진다. 확연히 입실과 입원은 달랐다.
입실을 할땐 잠이 그토록 달았지만, 입원을 하면 잠자는게 고통이다. 그리고 잠도 안온다.
가끔씩 찾아오는 친척분들이 너무도 귀찮았다. 차라리 안오기를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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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내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왜이리 어색하게 느껴지던지. 난 고개를 돌려 부모님과의 눈을 피했다.
3일뒤에 안 사실이지만 6개월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다. 너무 독한 약을 먹는탓에 머리털은 하나도 안남았고, 털이란 털은 모조리 불태워진 듯 사라졌다. 가끔씩 맞는 주사는 감기주사와는 차원이 다르다. 어떨땐 뼈에다 놔 줄때도 있는데, 기름에 손목을 넣었을 때보다 더욱 고통스럽다.
요즘엔 하루에 3시간 이상 잔적이 없다. 이제 눈도 제대로 감겨지지도 않고 피곤하지도 않다. 가끔씩 이상한 생각도 드는데 다시 군부대에 들어가, 그렇게 지겨워하던 청소를 하고 싶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눈물이 요즘따라 많이 나온다. 그렇게 우울하고 차갑던 내가 ‘죽음’ 앞에서 변화를 느끼나 보다.
입실에 목말라 보험사기꾼처럼 입실 사기꾼이 되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왜이리 웃기던지. 참 좋은 추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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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부모님이 내 손을 자고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난 부모님과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또한 눈물을 흘렸다.
신호가 온다. 내가 죽을 것을. 머리가 미친 듯이 아파오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부모님 손을 꽉 잡고 싶은데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병원에 입원해서 그렇게 잠도 안오던 내가 지금 잠에 들것 같다. 왜이리 졸린지.
부모님께 모차르트의 ‘휘가로의 결혼’을 틀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잠에 들었다. 너무 행복했다. 꿈같은 잠을 잤다. 그리고 다시 깨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잠을 실컷 자게 되었다니. 너무 행복했다.